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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월드/육아공부

[도서] 엄마교과서 -박경순-

이 책을 만난건 정말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healing 해주고,,

내 마음 깊이까지 다시 한번 들여다 볼 수 있었던 진짜 엄마 교과서,,

 

글귀 하나하나가 다 너무 좋고, 뼈저리게 공감하는 부분들이라서 다 씹어서 아작아작 먹고 소화시키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정리는 꽤 긴 글이 될 것 같다..

 

이 책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모 자신을 돌아보는 산책의 공간이다..

 

 

 


 

자녀를 키우는 것이 '행복해 죽겠다' 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런 타고난  '모성애'도 없는 사람이다.

무력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답답함 때문에 항상 어디 아픈 사람처럼 다니기도 했다. 오죽하면 정신분석을 하려고 맘을 먹었을까

 

'아, 부모 노릇이란 이런 거구나' 깨닫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이미 '중요한 시기'를 훌쩍 지나버린 뒤였다.

 

-> 나 역시 이런 마음으로 누군가는 나와 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기를 바라기에 다 같이 행복한 육아를 했으면 해서 정리 해 본다..

 

우리는 완벽한 부모가 되기를 꿈꾸지만, 자녀 앞에서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때로 부족한 부모로 비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완벽한 부모인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모두 미성숙한 채로 부모가 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한 과목으로조차 배운 적이 없으며, 예행연습을 해본 적도 없다.

그저 부모가 우리에게 해주었던 기억을 더듬어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 뿐이다.

 

완전한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 없는 부모가 자녀와 함께 성숙해가는 과정이며, 그 성숙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갈등' 이라고 보았다. 자녀와의 갈등 속에서 비로소 부모로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생기고, 그 갈등을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간다고 보았다.

 

부모들이 학자들이 낸 맛(주관성)에 치우치지 않고, 부모 스스로 견고한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는 판단력을 스스로 키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모교육에는 정답이 없으며, 해답은 부모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영화 촬영을 할 때 여러 각도에서 앵글을 잡으면 다채로운 영상이 나오듯, 같은 영역이라도 각도를 달리 잡으면 또 다른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자녀였으며, 누군가의 돌봄과 훈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 과정이 지금 내 모습에 고스란히 남아서 자녀에게 스며든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녀 문제가 절대 부모의 잘못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분명한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아이들은 불편함을 표현할 뿐 해결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을 누가 시작했든, 아이들은 스스로 풀 능력이 없고, 그 숙제는 고스란히 부모의 몫으로 남게 된다. 다른 대인관계에서의 갈등은 한 번 참으면 그만이고, 안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자녀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외면할수록 눈앞에 서있고, 피할수록 파고든다. 이것이 부모가 갖는 딜레마이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사랑이란,

누군가와 나누어 먹어야 할 파이 조각 같은 것이다.

부모는 온전한 파이를 아이마다 하나씩 준다고 생각하지만, 받아먹은 아이 입장에서는 항상 조각만 먹는 심정이다.

부모의 사랑이 크다 해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성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파이 나누기의 특징은 항상 남의 것이 더 커 보인다는 것이다.

 

애정이란 감가나 고구마처럼 개수로 나누어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무리 먹어도 또 먹고 싶은 그저 파이 한 조각일 뿐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헌신하고 사랑을 많이 준다면, 그 파이 조각의 사이즈가 다른 가정보다 좀 클 뿐,

나누어 먹는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부모의 마음엔 방이 여러 개 있고,

그 크기와 깊이가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자녀들은 각기 다른 방에 자리하고 있다.

큰 아이는 95점을 맞아도 한 개 틀린 것이 못마땅하고,

막내는 80점만 맞아도 기특해 죽겠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부모가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동생의 방이 나의 방보다 훨씬 더 크고 에쁘다는 것을

아무리 고루 나누어준다고 해도, 편견이나 편애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부모의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마음의 방'에 아이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배정되어버렸다면 문제는 좀 달라질 것이다.

큰아이는 항상 어른스러워야 하는 마음의 방에,

작은아이는 그저 예쁘고 귀엽기만 한 마음의 방에 일찌감치 배정되어버렸다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전문가들은 '착한 아이' 뒤에 증후군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즉 그 자체로 건강하지 않다는 뜻이다.

감정의 절름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원활하게 활용하지 못하고 '착함'을 하나의 방어기제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대게 희로애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식탁이나 책상은 대게 네 개의 다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중 어느 하나의 나사가 헐거워지면 가구로서의 온전한 기능을 할 수 없다.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쪽을 차단하거나 어느 한쪽이 두려워 다른 쪽만 사용하게 되면 감정의 불균형을 가져오게 된다

 

부모가 내게 시선을 주지 않을 때,

아이는 부모를 바라보면서 부모가 뭘 원하는지를 끊임없이 탐색한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그 단비 같은 순간을 아이는 놓치지 않는다.

아이는 그 단비를 찾아 끝없는 사막을 걸을 것이고, 그 단비를 찾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것이다

바로 칭찬이 독이 되는 순간이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남이 원하는 것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자,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게 될 때, 우리는 칭찬이 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는 좋을 수 있지만, 본인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자각하기 어렵게 될 수 있다.

 

엄마가 아이에게 민감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거꾸로 아이가 엄마에게 민감하게 되어 엄마가 원하는 대로 순응하는 아이가 된다고 했다.

자신의 욕구는 묻어둔 채 엄마가 원하는 것을 마치 자기가 원하는 것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엄마에게는 좋을 수 있지만, 아이에게는 비극적인 인생의 출발이 된다.

처음 몇 번은 울고 떼를 쓸 수 있겠지만, 이내 포기하고 순한 아이가 될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감추어둔 채 남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며 살게 된다.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어도 '아무거나' 먹고 싶은 아이

무얼 하고 싶으냐고 물어도 '아무거나' 하고 싶은 아이로 자랄 수 있다는 뜻이다.

 

위니콧은 아기가 자신의 신체를 통해서 엄마를 느낀다고 했다

엄마의 사랑과 기쁨이 전달되면 아이의 마음속에 행복한 그림이 그려질 것이고

엄마가 우울하거나 무력하면 우울한 그림이 채색된다고 한다.

 

순둥이와 떼쟁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전혀 다르지만, 갖고 있는 마음의 상처는 똑같다.

바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좌절이다.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세심히 마음을 살펴가면서 해야 하는 훈육의 과정은 부모들에게 가장 어렵고 많은 인내력을 요구하는 부분이다.

아직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무례함이나 공격성을 다룰 때 부모가 먼저 이해해야 할 것들이 있다.

1. 꾸지람을 들을 때 아이는 부모가 나를 미워한다고 느낀다

2. 아이는 부모가 화내는 감정과 체벌하는 행동을 배운다

이것만 주의한다면 어떻게 훈육하든 관게없지만 이런 부작용을 피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부모는 유아로 하여금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부모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무례해도 웃으면서 받아주라는 뜻이다.

나는 경험해보지 않은 일이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 마음이 얼마나 살가워야 무례한 짓을 해도 아이가 예뻐 보일까.

부모 마음이 얼마나 살가워야 자식이 떼를 써도 밉지 않을까.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르면

우울이란 '내부로 향하는 분노'이다. 남에게 화를 내는 대신, 자신을 미워하고 비난하게 된다

스스로를 못나서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여기게 된다. 자신감이 없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대상관계 발달이론이란 아이의 마음이 엄마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어가는지 설명하는 정신분석 이론이다.

유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엄마가 어떻게 아이의 마음을 보살펴야 하는지, 아이의 마음속에 자존감, 즉 마음의 근육이 생긴다는 것은 무엇인지,

아이의 공격성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엄마와 심리적으로 분리되어가는 과정에서 적절한 좌절은 어떠한 것인지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 보울비는 안정애착과 불안정 애착으로 표현

-> 코헛은 나르시시즘의 재조명을 통해 아이가 엄마의 심리적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 엄친아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비극에 대해 설명

 

유아에게 엄마의 '공감'은 심리적 생존에 필수적이다

공감의 상실은 모든 올바른 행동의 상실을 가져오며, 아이를 무능력하게 만든다 -하인즈 코헛-

 

<나르키소스의 전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예뻐 하염없이 바라보다 결국 물속에 빠져들어 죽었다는 것

->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손을 진정으로 잡아주는 단 한사람만 있으면,

자신을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우리는 절대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화사함과 내면의 공허감, 이것이 나르시시즘이 갖는 비극이다.

남 보기에 화려한 경력은 내면의 공허감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

 

나르시시즘 : 심리적 공갈젖꼭지

심리적 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지만 실제로 채워지는 것은 없는 것

공갈젖꼭지를 빼면 금세 다시 배가 고파지는 그런 것

그것이 사랑이든, 먹을 것이든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것 그것이 나르시시즘의 속성이다.

 

자신을 바라봐주는 사람이 없을 때, 위니콧이 말한 대로 자신의 욕구보다 상대, 즉 엄마의 욕구에 민감해져서 자신을 잃은 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거짓 자기' 를 발달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채워주지 않으면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

사랑,애정,인정을 받는 것은 아이들에게 때로 목숨만큼 중요해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한다.

내가 배고파도 동생에게 과자를 양보하는 이유는 부모로부터 칭찬과 관심을 얻기 위한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모범생일 수 있지만 '목적'이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상발달로서의 나르시시즘이란

유아의 정상적인 발달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

그리고 그것을 엄마아빠가 알아주면 좋겠어

그냥 내가 잘났다고 믿는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내가 최고이고,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시기다.

모두 정상발달이다. 유아동기 전체를 하나의 산에 비유한다면 이 남근기적 나르시시즘은 그 산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부터는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죽도록 미운 동생을 '보듬는 척'이라도 해야 하며,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수히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좌절을 잘 감내하고 참아내려면, 나르시시즘의 정상에서 내가 최고라고 외치는 '야호!'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희열의 경험이 있어야 아니꼬운 세상도 참아낼 수 있고, 나보다 잘난 친구가 있어도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이란 말 그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이다.

남의 슬픔을 그대로 내 마음속에서 느껴주는 것, 그래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

 

코헛은 모든 발달상의 문제를

어머니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 즉 '공감의 실패'로 보았다.

 

헌신과 공감은 다르다

 

공감이 빠진 헌신은 조건부 헌신일 뿐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안다.

즉 내가 어떻게 해야 부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피부로 느낀다.

뽀뽀만 해줘도 부모가 나를 이뻐해줄 것이라고 믿는 아이가 있는 반면,

평생 벌어도 갖기 힘들 별장 같은 집과 차를 주어야 부모가 기뻐할 거라고 느끼는 아이가 있다.

같은 부모 아래 자식인데, 부모의 마음속에 머무르는 방이 다르면 그렇게 된다

아이가 다르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다르게 대하는 것이다.

 

훈육과 적절한 좌절의 시소타기

살아가는데 있어서 좌절을 경험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좌절을 어떻게 겪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훈육할 때 좌절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좌절하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아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좌절이 가장 최적이고, 그 최적의 정도는 물론 아이마다 다르다.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를 잘 가르치기 위한 훈육이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좌절이 된다.

더욱이 약자인 아이의 입장에서는 '엄마는 나를 미워해'로 전해져올 수 있다.

아이에게는 훈육이 불안, 특히 두려움을 동반하는 불안을 자리잡을 수 있으므로 가급적 엄격한 훈육은 유아기 발달의 정점에 이르는 시기까지는 피하는 것이 좋다

 

말귀를 알아듣는 3세경이 될 때까지는 가급적 훈육을 미루는 것이 좋다

더욱이 2세경에 아이들이 피우는 고집이나 공격성은 본능에서 올라오는 것이거나 몸을 아직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 화가 나서, 누구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의 불협화음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이럴 때 엄한 훈육으로 다스리면 아이는 외부세계를 두려움으로 지각하게 된다.

특히 남아는 대뇌발달이 더디기 때문에 통제능력이 여아보다 더 떨어진다는 연구보고를 참고한다면

남아는 더 늦춰져야 할 수도 있다.

 

하인즈 코헛

-> 코헛의 어머니는 남편으로부터 거둬들인 애정을 외아들인 코헛에게 쏟았다

외모, 공부, 예술 무엇하나 빠질 것 없는 아들에게 그녀는 모든 것을 헌신하였다. 코헛또한 충실한 엄친아로 성장하였다.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심리적 공허감,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코헛은 정신분석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40세)

정신분석가가 된 코헛은 오랫동안 프로이트 이론에 충실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 이론만으로는 자신의 우울감이나 공허감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의 갈등이 원천봉쇄된 삶을 살았던 그는 어머니가 얼마나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왜곡시켰는지를 깨달은 후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생을 살았다.

코헛은 자기심리학에서 정신병리, 특히 자기애적 성격의 원인을 어머니의 잘못된 양육으로 보았으며

특히 어머니가 아이에게 공감해주지 못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보았다.

코헛의 어머니 역시 표면적으로는 매우 헌신적인 엄마였지만 그런 어머니의 헌신에는 엄마가 원하는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라다녔다.

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의 가혹함은 이미 어머니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서 경험했기에

코헛은 항상 어머니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유아들은 마음을 둘로 나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감당할 수 없는 나쁜 마음은 밖으로 투사한다

엄마는 아이가 투사한 나쁜 마음을 담아주어야 한다

엄마가 그것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다시 유아에게 되돌아올 때

유아는 커다란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 멜라니 클라인 -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좋은것과 나쁜것으로 양분해 놓는 이유가 있다

좋은 감정 상태는 내 것으로 갖고 있기 편한 반면

나쁜 감정 상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체적 균형상태를 깨트리는 상황을 견디기가 어렵다.

유아는 이런것들을 감당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형성된 내 안의 나쁜 감정을 밖으로 내쫒아버린다.

즉 '내 안의 나쁜 누군가를 몰아내야 한다' 고 느낀다는 것이다.

'우는 행위' 이것은 바로 자신의 기분 나쁜 신체 혹은 감정 상태를 밖으로 축출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배고플때 유아는 '나쁜 악당이 나를 괴롭힌다' 고 생각한다

누군가 젖을 먹여줘 배가 부르고 기분이 다시 좋아지면 '내 안에 좋은 누군가가 있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다시 만들어낸다

반면 배고파 우는데 누군가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 '어 더 뭐운 악당이 나를 괴롭히네 ' 이렇게 이야기가 수정된다.

무서워진 아이가 더 크게 울고 더 세게 얻어맞으면 이야기 속의 악당은 차츰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무서운 악마로 변하게 된다

공포라는 감정이 아이의 마음속에 채색되기 시작한다.

불안이란 좋지 않은 무엇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신호이며

공포는 어떻게 해도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이다

-> 박해불안, 분리불안으로 발달해가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엄마는 아이의 언짢은 감정을 담아내는 , 좋게말하면 세숫대야 솔직히 말하면 쓰레기통이 될 수밖에 없다

위니콧은 수용해주기라고 표현했고

비온은 담아주기라고 명명했다.

 

어쨌든 감정의 배설물을 내놓는 곳은 엄마이다.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걸어다닐 수 있게 되면서

두개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된다

좋은 경험/좋은엄마는 동그라미

나쁜 경험/나쁜엄마는 가위표

개수로 놓고 셈을 하면 된다 이렇게 셈을 하고도 동그라미가 더 많아야 괜찮은 나, 괜찮은 엄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아이는 다시 시작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마음속에 두 마음을 지니고 살거나 계산대로 나쁜 대상과 대적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합산하는 과정에서 플러스가 되는 과정 즉 '괜찮은 경험'을 하는 과정은 엄마의 역할에 달려있다

엄마의 존재는 감정의 배설물을 받아내는 역할뿐 아니라 감정의 여과기 역할을 해야 한다

나쁜 감정의 찌꺼기를 받아서 맑은 감정으로 정화시켜 다시 되돌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여과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탁구라켓이 되면?

아이가 내보낸 감정의 공을 엄마가 자꾸 떠넘기면 그 과정에서 아이의 불편함은 불안함으로, 불안함은 다시 공포로 커지게 된다

원인이 아이들에게 있을 수 있으나 스스로 정화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결과는 결국 부모가 떠안을 수 밖에없다.

 

영유아기는 아이의 '감정의 회로'가 만들어지는 시기

이것을 통해서 아이의 희로애락의 길들이 만들어진다.

슬픔의 길이 많이 만들어진 아이들은 웬만한 일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만족감을 많이 경험하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좌절에도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탄력성 없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런 감정의 길은 영유아기에 거의 다 만들어진다

그러기에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도,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후에 아무리 배워도 알아도 체득하기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착한아이와 나쁜아이는 심리적 샴쌍둥이

이렇게 행동이 전혀 다른이들의 공통점은 '결핍' 즉 감정의 여과기가 없었다는 공통된 주제를 갖고 있다

판도라 상자, 특히 사춘기에 열린 상자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김밥 옆구리 메우듯 그렇게 땜질할 수가 없다.

 

아이를 잘 키우려면 '많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많이 예뻐해주고 사랑도 많이 주기만 해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다면 자녀 양육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적어도 첫돌이 지나면 애완견 수준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오히려 사랑보다 공격성을 잘 다루어주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제삼자보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것을 다루고 인내하기가 훨씬 어렵다

 

착하다,순하다,고집이 세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말들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부모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

즉 아이의 행동을 부모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모든 행동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아이가 부모에게 보내는 중요한 감정이 담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행동에는 부모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한 메시지긔 결과일 때도 있다.

 

연령에 따른 아이들의 공격성

 

1-2세 아이들의 공격성

: 예를 들어보자 아기가 운다. 그냥 짜증이 나서 운다. 기저귀가 젖었는지도 모른다. 배가 고픈지도 모른다. 아기가 느끼는 것은 그저 배가 이상하고 배 속에 무엇이 있는 것 같고 짜증나서 운다. 우는 행위는 그 불쾌감을 밖으로 내보내고자 함이요, 그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는 요청이다.

이때 누군가가 안아서 달래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여하튼 어찌해서 다시 편안해지면 유아는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반대로 아무리 울어도 달래주는 사람이 없으면, 내 울음에 내가 더 놀라고, 가뜩이나 작은 체구에 혈당까지 떨어지면 어지럽고 무서운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이 상황을 아이는 이야기로 만든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해칠지 모른다. 거기에 엉덩이까지 한대 맞고, 화난 목소리가 들려오면 아이의 환상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 공격성의 역동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된다.

 

2-3세 아이들의 공격성

: 무례함 / 싫어, 아냐, 내거야, 엄마 미워 얄밉도록 제 필요한 말만 골라서 배우는 것 같다. 부모 입장에서는 말 안듣는 아이, 순한 아이가 아닐 수 있지만 모두 정상발달이다. 이시기에 보이는 공격성은 자기 주장으로 가는 이정표의 시작이며 여기서부터 희로애락의 감정이 본격적으로 구체화 된다.

 

무례함에서나오는 행동들을 다루는 방법은 놀이로 순화시키는 것이다. 아빠를 총으로 빵 소면, 꼴깍 죽어줘야 한다.

엄마를 때리면 아프다고 울고 굴러야 한다. 내가 무심코 하는 행동이 상대방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면 된다.

그것을 말로 하기보다 놀이로 보여주는 것이 아이에게는 상처 덜 받으면서 이해하는 방법이다.

 

3세 이후 아이들의 공격성

: 3살 이후에 보이는 공격성은 좀 더 경쟁구조를 띤다. 누구보다 더 잘하고 싶고 누구보다 더 사랑받고 싶고 그것이 좌절되어 나타나는 것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때의 공격성은 우울감과 관련될 경우가 많다.

 

컨버그는 사랑학과 관련하여 사랑에 빠지는 능력과 사랑을 유지하는 능력은 다르다고 했다.

사랑에 빠지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성숙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동전 뒤에 있는 공격성을 수용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깊이 들어갈수록 사랑은 공격성과 맞닿아 있다. 그 부분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 사랑도 유지하기 어렵다.

누구를 만나도 감정의 같은 지점에서 헤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아마도 이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공격성이 두려움과 함께 있을때, 두려움을 먼저 안아주어야 한다

공격성이 우울감과 함께 있을때, 우울감을 먼저 이해해주어야 한다.

 

성장과정에서 사랑이 자리 잡아야 할 공간에 미움, 증오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나보다 언니를 더 사랑해' 등의 생각이 들어와 앉게  되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눈치보고 , 불안하고, 의심하게 된다. 본인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마음을 둘로 나눈다고 했고, 그것이 정상발달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이 통합되지 못하고 남아있게 될 때, 사랑을 믿지 못하게 된다. 고깔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마음이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을 유지할 수가 없다. 사랑과 증오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상과 불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타고난 기질과 더불어 클라인이 말하는 영유아 시절 엄마와의 튜닝과정 실패 때문이라고 본다.

배가 고파 울어도 아무 반응이 없던 기억,

천둥치는 방에서 혼자 몇 시간씩 울었던 기억

그릇을 떨어뜨려 깼다고 엉덩이를 맞던 기억

엄마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나보다 싶어 방에서 혼자 울던 기억

그런 미움과 억울함이 있어도 엄마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일 없다는 듯 내가 먼저 다가가서 엄마에게 안겼던 기억

이런 것들이다.. 마치 혼탁한 물을 그대로 두어 바닥에 가라앉은 침전물 같은 것, 남들은 윗물만 보지만

내 마음에는 차곡차곡 가라앉아 있는 화, 분노, 억울함 그리고 무참한 사랑의 찌꺼기들, 그런것들이 환상과 불신을 만든다.

 

엄마, 그 고달픈 직업에 대하여...

'꾸물이' 엄마는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맹세한다. 오늘은 절대로 아이에게 화내지 말아야지. 어제도 꾸물이에게 화내고 회초리까지 들게 되어,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는 마음이 무척 아팠었다. 돌아서면 안쓰럽고 바라보면 화가 난다.

-> 화를 내면 안 되는 것도 알고, 아이가 안쓰러운 마음도 있는데,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감정 때문에 괴롭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부모는 없지만,

아는대로 키우는 부모도 없다.

아는대로 키워지지도 않고, 안다고 내 행동이 그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내 보잘 것 없는 부모 노릇 때문에 자괴감만 커갈 뿐이다.

아이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하지만, 부모 또한 아이로부터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그런데도 왜모든 책마다 자녀를 사랑하라고 써있는지..

 

자식은 소모성 보험이다

평생 쏟아 부어도 아무것도 받을 수 없고, 나달나달 죽을 만큼 사고가 나면 개미 눈물만큼 나오는 소모성 보험 같은 것이다.

매번 적금 넣을때 갖는 기대감 말고는 사실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속의 작은 아이

꾸물이네로 다시 돌아가보다

꾸물이 엄마는 반듯한 가정에서 자랐다. 결혼하고 살림도 잘하고 내조도 잘하고 아이도 깔끔하게 잘 키웠는데

언제부턴가 아이와 어긋나기 시작했다. 도무지 생각대로 따라주지를 않는다.

단 몇 마디 설명만으로도 꾸물이 엄마는 열심히,참하게 살아왔음을 믿어 의심치 않게 한다.

아마 태어날때부터 부모가 부여한 '큰딸'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한 번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그르쳐본 적이 없이 자라온 꾸물이 엄마는 뭐 한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아이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고통이다

또한 어릴적부터 내게 주어진 일을 잘 해내려고 애쓰면서 살아온 꾸물이 엄마는 아이를 잘 키워내지 못한 '실패한 엄마' 로서의 모습이 더 좌절스러울 것이다.

 

'일찍 철이 든다'는 것은 부모에게 좋을 뿐 아이에게 좋을 것은 단 한가지도 없다

마치 익지 않은 바나나를 억지로 숙성시키는 작업과 다를 바가 없다.

아이는 욕망의 덩어리다. 그래서 아이다. 이기적일만큼 자기 중심적이다. 먹고 싶은 것은 당장 먹어야 하고,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한다

부모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이미 아이가 아니다.

'철들지 않은 모습'은 아이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일생에 어느 순간에도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꾸물이 엄마의 경우에는 이런 철들지 않은 아이가 상실되어 있다.

어릴 때 부모가 부여해준 역할을 해내기 위해 일찍 철이 들어버렸을지 모른다

그러니 꾸물이 엄마의 마음속에는 꾸물거리는 아이를 이해할 수 있는 퍼즐이 놓일 자리가 없다. 철없는 아이를 보면 불안해진다. 그래서 자꾸 화를 내게 된다

 

꾸물이 엄마의 마음에는 성인이 되도록 자라지 못한 '작은 아이'가 마음 깊은 곳에 갇혀 있다.

 

부모가 아이였을때

그 부모로부터 받았던 많은 것들이 마음속에 채색되어 있다. 기억에 없다고 잊혀진 것이 아니다.

몸은 기억하고 있고, 그것이 감정반응으로 나온다. 부모교육이 책대로 안 되는 이유이다.

 

아이와의 갈등은 엄마와 아이의 싸움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아이와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작은아이'와의 싸움인 경우가 많다

아이의 엄마 속에 있는 '주눅 든 아이' '억울한 아이' '불안한 아이'와의 싸움일 수 있다

해서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잘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어떤 아이였고, 우리 부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가 아이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 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면 더 기죽을 수 있으니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 말은 마치 엄마는 꾹꾹 참다 화병나서 죽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다.

 

두 살이 엄마 노릇 대신할 만큼의 터울은 아니다

그저 같이 어울릴 만하고, 내 것을 누군가 가져가면 하면 화나고

나보다 누군가를 더 예뻐하면 질투나는 그런 나이 차이에 불과하다

 

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자라는 토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토양과 기후에 맞게 적응해나간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부여하는 역할, 기대, 금기에 따라 적응하며 자란다

뿐만 아니다. 누구에게든 어린 시절의 상처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억울하거나 화나는 감정들은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눈처럼 차곡이 쌓인다.

만년설처럼 쉽게 녹지 않는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사랑에 녹을 수는 있다. 하지만 녹아서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 마음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역동적인 가족 치료사인 보웬이 말하기를

부부는 정신적 성숙도가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고 이것이 자녀에게 대물림 된다고 하였다.

 

성숙이란 흔히 '어른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으로 성숙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히려 그 어른스러움이 미성숙을 방어하기 위한 것일 때도 있다

 

무엇이든 지나친 것은 무언가를 방어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지나치게 엄격하다든가, 지나치게 금욕주의적이라든가

 

심리학에서 성숙한 사람이란 유연한 사람이다

부모라도 잘못한 것이 있으면 자녀에게 정중히 사과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마음이다.

 

자존심이 세다는 것은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해서 단단히 무엇으로 감싸려는 태도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상처받는 상황에 민감하고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잘 귀 기울이지 않으려고 한다. 약한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어느 영장류보다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보호를 가장 많이 받는 영장류인 동시에 제약도 가장 많이 받는다

훈육이라는 이름하에 많은 권력이 행사된다

때로는 부모의 이유없는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약자이다보니 부모가 나를 미워하는지 아닌지에 촉각을 세우고 단순한 훈육이나 꾸중에도 부모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불안해 한다

 

사춘기나 청소년기가 되어야 부모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지적, 정신적 힘이 생기게 된다

부메랑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학부모 면담을 할 때 그들의 부모에 대해서 물으면 대부분 추상적으로 대답한다

희생적인 분, 자녀를 위해 애쓰신 분 등

감정이 담긴 대답을 회피한다

사랑했다, 미워했다, 서러웠다, 이런 대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특히 살가움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느낌을 잘 모른다

그래서 가끔 묻는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의 품에 있다고 느끼면 어떤 감정이 들지

아니 지금 엄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고 상상하면 어떨 것 같은지

상상이 잘 안된다고 한다든가 불편하거나 어색할것 같다고 하면 살갑지 않은 것이다

 

아이가 예뻐서 어쩔줄 모르는 그런 살가움을 받은 경험이 나와 부모 사이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 살가움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살가움이 무엇인지부터 배우고 느껴보는 일이다.

 

살가움이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일차적인 의사소통은 피부접촉이다

아이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바라보고 안아주는 느김을 유아는 피부를 통해서 받아들인다.

부모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며 아이와 함께 성장해간다

내 안에 갇혀있는 자라지 못한 아이를 자녀가 끄집어내고 그것이 갈등을 만들기도 한다

아이를 키워야 하기 때문에 들여다볼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내 모습을 깨우쳐나가면 부모이자 인간으로서 다시 한번

성숙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은 성숙으로 가는 제일 관문이 된다